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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2000과 라미 디자인의 역사 (1)

Jay김 2020. 8. 18. 20:59

해당 글은 LAMY 팬이 번역했습니다.

소개

라미 2000은 Fountain Pen Network 웹사이트에서 제일 많이 추천되는 펜 중 하나다. 이는 펜 자체가 흔하게 널려있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도 하며, 잉크를 흡입하고 방출할 수 있는 고성능 피스톤 메커니즘, 금닙, 그리고 세련된 디자인 감성을 동시에 담아내기도 했으며, 라미가 제품에 대해 뒤에서 강하게 보증을 서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찬양에도 불구하고 라미 2000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펜이기도 하다. 변덕스러운 닙, 단순한 색상, 그리고 디자인의 세세한 점들까지 포함해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만 해도 벌써 새 유저들이 라미 2000의 성능이나 관리 문제에 대한 스레드를 몇 개씩이나 열어놨다. 이는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문제다.

라미 2000은 1960년대 중반에 디자인되었고, 라미 자체에서도 디자인 중심 생산의 이미지를 키워왔기 때문에 이 펜과 펜에 담긴 바우하우스 감성은 일종의 신비에 감싸여 있다. 기업 자체, 펜, 그리고 이 둘이 비롯된 디자인 전통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나는 많은 것들을 읽어봤고 이 글을 위한 초록(draft)을 쓰는데 내 라미 2000을 굉장히 많이 사용했다. 내 활동의 결과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다.

라미 2000 가족: 만년필, 에디션 2000 만년필, 2012 라미 2000M 만년필, 에디션 2000 볼펜, 볼펜, 4중색 볼펜, 샤프, 롤러 볼펜

존 시라쿠사(John Siracusa) Ars Technica 웹사이트에 올린 글에 따르면 대부분의 괴짜들은 깐깐하게 비평하고자 하는 경향이 "단순히 인기 있는 방송이나 영화의 논리적 오류나 과학적 고증 오류를 지적하는 것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이는 키울만한 가치가 있는 능력이다. 아마 당신은 전반적으로 지식이 부족해 당신의 비판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일수도 있는 아주 적은 가능성은 둘째 치고, 이것이 당신을 멈추게 만드는 이유일 수는 없다."라고 한다. 시라쿠사의 팟캐스트 Hypercritical의 슬로건은 "그 어떠한 것도 아예 불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할 수는 없다."다. 이러한 괴짜 정신에 따라 나는 라미 2000 펜 라인업의 모든 것에 대한 아주 깐깐한 비평을 하고자 한다. 나는 이 글이 다른 Fountain Pen Network에 올라와 있는 haywoody의 리뷰 "라미 사파리: 몇 가지 역사적(이고 괴짜만 알만한) 사실들"과 Diplo의 아름다운 "오로라 88 왕조"와 같은 글들의 반열에 오르길 희망한다. 나는 이에 더해 이 주제에 대해 더 아는 사람들이 와서 이 글에 추가 정보나, 이의 제기, 수정 요청 등을 해 활기 띈 대화를 이어나가 주길 바라고도 있다.

1편은 라미 사의 역사, 라미의 디자인 초점의 유래, 그리고 라미 2000이 비롯된 디자인 철학을 묘사한다. 2편은 펜의 제작에 들어간 재료, 무게와 각종 구조적 특징을 다루면서 디자인에 대한 후기를 이어나간다. 3편은 라미 2000의 주 구성 부품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다룬다. 4편은 라미 2000을 완전히 분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다룬다. 5편은 간단하게 라미 2000 라인업의 널려있는 기본 만년필부터 고급 한정 모델까지 포함한 각 제품에 대해 다룬다. 결론 부분에서는 이를 전부 통합할 것이다. 

라미 사의 역사, 라미 디자인의 유래, 라미 2000 스타일의 철학

라미 2000 시리즈의 첫 번째 구성원인 만년필은 필기구 전반과 라미에게도 전환기였던 1966년에 등장했다. 1960년대 중반 라미는 빠르게 판매 실적을 올릴 수 있는 뾰족한 수가 필요했다. 1950년대 중반에 등장했던 라미 모델 27 또한 성공작이었으나 라미는 판매 실적을 올려주고 필기구 산업에서 자신들이 한 번만 반짝 유행하고 사라지는 것을 내놓는 기업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제품을 찾고 있었다.

라미 2000 판매를 시작한 1966년도 전에 라미는 그저 흔하게 널린 기업에 불과했다. 라미의 창세기는 파커펜 기업의 하이델베르크 지사의 대표였던 C. 조세프 라미(C. Josef Lamy)에 의해 주도되었다. 1930년에 그는 자신의 기업을 세워 Orthus와 Artus 브랜드 이름 아래 펜을 제작해 팔기 시작했다. (같은 공장에서 펜과 탄약을 생산하며) 2차 세계대전을 힘들게 거친 그는 1948년에 기업을 C. Josef Lamy GmbH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다. 라미의 첫 번째 대표작은 라미 27이었다. 이 제품은 FPN 웹사이트의 멤버인 MYU에 의해 아주 훌륭하게 후기글라미 27-파커 51의 경쟁작,”에서 다뤄져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라미 27은 1952년도에 소개되었다. 이 제품은 유선형 디자인에 오스뮴 팁이 달린 반후드 닙으로 구성되어 있는 굉장한 베스트셀러였다. 27은 20 독일 마르크에 팔리던 27e 플라스틱 모델부터 39 독일 마르크에 팔리던 고급형 금 뚜껑 모델인 27n까지 포함해 총 12가지 종류가 생산되었다. 당시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던 상표를 가지고 있었던 만년필에게 몽블랑이나 펠리칸 사의 제품 가격대에 가까웠던 이런 가격은 전혀 낮은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생산되던 Orthos나 2차 대전 후의 Artus와는 달리 27은 제작한 회사의 이름을 가지고 생산된 최초의 펜이었다. 검소한 외모를 가진 이 펜은 특허받은 혁신적인 기압과 온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리고 현재에서도 계속 쓰이는) "tintomatic"이라고 불리는 피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1962년 회사 설립자의 아들인 만프레드 라미 박사(Dr. Manfred Lamy)가 마케팅 매니저로서 입사했다. 그는 처음부터 라미가 일정하거나 눈에 띄는 차별화된 디자인이 없다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라미 박사의 프로젝트는 "라미 디자인"이라는 예술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이는 라미 2000 개발 프로젝트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기 위해 라미는 펜 디자인 작업을 당시 산업 디자인계의 대명사이자 명성 높은 디자인 아이디어 발전소였던 브라운(Braun) 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게르트 알프레드 뮐러(Gerd A. Müller)에게 계약하여 맡겼다. 당시에 이것은 위험요소가 많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지금 뒤돌아보면 우리는 이게 본전 이상을 뽑은 투자였고 어떤 과정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안다. 과연 당시 일이 어찌나 잘 돌아갔는지 "라미 디자인"은 현재까지 몇 명의 핵심 디자이너들의 실력과 재능을 축으로 돌아간다. 첫 번째는 뮐러와 라미 2000이다 (그리고 나중에 CP1, ST, 그리고 Unic), 그 후 볼프강 파비안(Wolfgang Fabian)과 라미 사파리/알스타, 그리고 현재까지 이르러 프랑코 클리보(Franco Clivo)와 다이얼로그 3이다. 당시 시장 연구와 설문조사는 라미 2000이 "본인의 이미지에 신경 쓰지만, 검소한 경향도 있는 성공한 중년 남성"들과 잘 맞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지만, 라미는 새 펜에 대해 기대 이상의 어마어마한 호평과 수요를 볼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보다시피다. 라미 2000은 1966년부터 꾸준한 수요와 라미의 플래그쉽 라인업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다.

라미 2000은 단순한 성공적인 제품 이상을 상징했다. 라미 사의 회사로서의 장기적인 성공을 위한 기반을 쌓은 것이었다. 라미 사는 "1966년에 라미 디자인의 독특한 스타일은 라미 2000과 함께 탄생했다"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한다. 라미는 따로 라미 디자인이 무엇인지 설명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회사 웹사이트에 다음 주장들을 열거해놓긴 했다.


디자인, 품질, 그리고 'Made in Germany'는 라미 기업 전략의 기둥들입니다. 이것들은 라미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다음과 같은 기업 환경이라는 기반에 세워져 있습니다.

  • 고객 중심: 우리는 고객의 요구사항에 집중합니다.
  • 창의성: 우리는 변화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으며, 매일 새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 협동심: 우리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협동적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기반으로 한 고성과(high-performance) 커뮤니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술, 프로세싱, 그리고 생산 재료 전반에서의 최고급 품질은 라미 제품 자체가 입증합니다. 라미의 필기구는 분명한 발언을 담고 있습니다: "높은 가성비." 저희 제품은 자체적으로 완비되었으며(self-contained) 간결합니다. 전통에 의해 저희 제품은 바우하우스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실용성 있는 디자인의 원칙을 담습니다. 이 접근은 라미 제품을 틀림없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그리고 라미라는 이름을 모범이 되는 브랜드 상징으로 만듭니다. 라미 필기구는 독일의 최고의 디자인 전통과 기술 공학의 예술을 담아냅니다. 이 제품들은 혁신성, 신뢰성, 검소함, 그리고 사치가 아닌 지능(intelligence)과 이어지는 지위의 미덕이 두드러집니다.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의 시카고 마천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바우하우스의 실용성 있는 디자인 원칙의 전통"과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부터 시작해 몇 가지 어구를 뜯어서 분석해보자. 그럼으로써 라미의 바우하우스 정통성에 대해서 라미가 진실된 주장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우하우스(Bauhaus), 울름(Ulm), 브라운(Braun), 그리고 라미

바우하우스 건축 학교는 망가진 독일에서 탄생했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를 뒤바꿔놓았다. 이 사건을 바우하우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세계사의 대격변"이라고 부른다. 기계 공업 재생산의 세계에서, 바우하우스의 선생과 학생들은 구세계의 장인 정신을 새로운 기법 (그리고 기술적인) 발전과 융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19세기 미술공예운동에서 강조하는 사용할 때의 기능성, 디자인에서의 미니멀리즘, 그리고 특히나 생산과정에서 발휘되는 장인 정신에서 영감을 얻었다. 바우하우스는 모더니즘, 생산, 실용성, 형태, 그리고 기능을 추구하는 디자인 혁신을 일으켰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설립 비전은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바우하우스 선언서와 프로그램 <발터 그로피우스, 1919>

바우하우스의 목표

바우하우스는 모든 창작 활동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그리고 모든 분야의 실용적인 예술 조각, 그림, 손공예, 그리고 그 외 공예 전반을 재통일 하고자 노력한다. 멀지라도, 바우하우스의 최종적인 목표는 내부에 기념비적인 예술과 장식 예술 사이의 구분이 없는 통일된 미술이 들어서 있는 하나의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계층의 건축가, 화가, 그리고 조각가를 각자의 능력에 맞춰 뛰어난 장인이나 독립적인 창의적 예술가로 교육시키고자 하며 미래를 이끌 예술가-장인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한다. 정신을 공유하는 이 사람들은 전체적인 구조, 마무리 작업, 장식, 그리고 내부 가구 모두에서 조화를 이루는 건물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원칙들

  • 예술은 모든 메서드 위에 선다. 예술 그 자체는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나 공예는 가르칠 수 있다. 건축가, 화가, 그리고 조각가 모두 진정한 의미의 장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험적이거나 실용적인 분야에 있는 워크숍들을 통해 진행되는 철저한 공예 훈련은 모든 예술적 생산 행위의 빼놓을 수 없는 기반으로써 모든 학생에게 필수 사항이다. 학교 자체의 워크숍은 점진적으로 지어질 것이며 외부 워크숍과의 견습 계약도 진행될 것이다.
  • 학교는 워크숍의 하인이며 언젠가는 완전히 워크숍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에는 스승이나 제자가 없고 오직 장인, 숙련 노동자와 견습생만이 있을 것이다.
  • 교육방식은 워크숍의 특징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는 (워크숍에서 실행하는) 수동적인 작업에서 발전하는 유기적인 형태이다.
  • 모든 뻣뻣한 엄격성, 창의성의 순위, 개성의 자유를 배제하고 오직 철저한 학문적 교육을 추구
  • 바우하우스 장인 의회나 외부 장인 앞에서 진행되는 길드 법규에 따른 장인 및 숙련 노동자 시험
  • 장인의 작업에 참가하는 학생들 간의 협력. 학생을 포함한 커미션 보장.
  • 나라의 각종 공예 분야들의 리더와 산업과의 지속적인 교류. 전시 및 다른 활동을 통한 사회와의 교류.

보통 바우하우스 디자인 철학은 흔히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혹은 "디자인 자체에 있는 기능"으로 요약되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정도 문구를 가지고는 바우하우스의 영향과 그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학교는 그 짧은 역사 동안 수많은 변화를 거쳐갔기에 바우하우스를 단순히 한 개의 접근, 철학, 혹은 디자인 윤리로 보는 것은 굉장히 대충바라본, 게으르고, 그리고 잘못된, 의심의 여지도 없는 환원주의적 시각이다. 바우하우스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nsky)가 프라이머리(primary) 색들과 원, 사각형, 그리고 삼각형의 기본 모양을 공부하는 바우하우스의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과 디자인 성향을 창립한 표현주의 시기로 시작되었다. 중세시기에는 학교를 재정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생겼기에 형태보다는 기능을 중시하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바우하우스 미학은 설계된 제품에 대량 생산 산업화를 적용하는 실험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기능"(functionality)이란 제품 자체의 기능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대량 생산에서의 제품의 기능을 뜻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브라운과 라미 같은 기업이 널리 알리게 될 산업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시초이기도 했다. 학교의 말기에는 바우하우스는 미술에서 건축 설계로 초점을 바꾸고 집과 가정용품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함으로써 그로피우스의 설립 비전으로 돌아왔다. 공립학교이었기에 바우하우스는 그 예산을 정하는 인근 지방 자치 단체들의 정치적인 압박을 느껴야만 했다. 바우하우스는 두 번이나 이전을 해야만 했고, 최종적으로 1932년에 나치당이 학교에 쳐들어와 강제로 폐쇄시켜버렸다.

바우하우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1928년; 라미 2000 디자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게르트 알베르트 뮐러 

1930년대 하이델베르크에 조세프 라미의 회사 설립과 1932년 초반에 정치적 자유와 창의성 모두에서 제한당한 바우하우스의 해체라는 시간 순서를 따져보면 둘은 접점이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참고하면서 나는 라미 2000의 디자인이 바우하우스 전통을 계승한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HfG 혹은 간단하게 울름)과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HfG/울름의 첫 번째 학장은 바우하우스의 졸업생인 막스 빌(Max Bill)이었고 울름조형대학 대부분의 교직원과 방문 강사가 바우하우스 교직원이었거나 졸업생이었다. (손목시계 팬들은 융한스(Junghans)를 위해 만들어진 빌의 고전 손목시계 디자인을 알아볼 것이다)  1953-1968 사이에 열려있던 울름은 예술적 창조 행위, 산업 디자인, 그리고 운용 과학을 강조했다. 이에 더해 울름은 대표적으로 브라운과 루프트한자 같은 기업들과 산업 파트너십들을 만들기도 했다. 브라운의 설립자인 막스 브라운의 사후인 1951 후반, 그의 아들들인 아투르(Artur)와 에르윈(Erwin)은 브라운의 이미지와 디자인을 현대화시키는 것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었다. 1954년에 이르러 브라운은 회사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지도 아래 울름 교직원, 학생, 그리고 대학원생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중에 라미 2000을 디자인하게 되는 게르트 알프레드 뮐러는 아투르와 에르윈 브라운이 고용한 일등급 산업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람스와 뮐러는 브라운 디자인 활동의 절정기였던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아주 가까운 협력관계였다. 람스는 브라운의 음향기기 개발을 감독했으며 가정용품이나 가정 기기는 뮐러에게 맡겼다. 그들의 디자인 윤리는 굿(good) 디자인 운동의 원칙들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짧은 몇 년 후 뮐러가 라미 2000을 만들고 "라미 디자인"을 탄생시킬 때 적용되었다. 이 디자인 원칙은 아마 디터 람스의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에서 제일 설명이 잘 되어 있을 것이다. 라미 디자인과 제일 관련이 많은 원칙들은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람스의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혁신의 가능성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고갈될 수 없다. 기술적 발전은 항상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혁신적인 디자인은 항상 혁신적인 기술과 함께 발전하며 그 자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제품은 사용되기 위해서 구입된다. 그것은 어떠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한다. 이 기준에는 제품의 기능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기준과 미적인 기준도 포함한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의 쓸모를 강조하면서 이것을 감소시킬 만한 것들을 전부 배제한다.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제품의 아름다움은 제품의 유용함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는 제품들이 매일 사용되며 사람들과 그들의 웰빙(육체적 정신적 건강함)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직 잘 디자인된 제품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사소한 디테일까지 철저하게 신경 쓴다: 아무것도 임의로 정하거나 확률에 맡기면 안 된다. 제품의 디자인 과정을 신경 쓰는 것과 정확도를 유지함은 곧 소비자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브라운과 라미를 위한 뮐러의 디자인

브라운에서의 작업에서 뮐러는 두 가지 디자인 성향을 라미 2000의 설계에 적용시켰다. 첫 번째는 매끄러운 곡선에 대한 선호였으며 두 번째는 철과 플라스틱의 재료 사용에 대한 선호였다. 뮐러가 브라운에서 만든 제품 두 가지를 아래에 예시로 올려놨다. KM3 반죽기와 SM 31 면도기다. 만년필을 리뷰하는데 왜 면도기랑 부엌 전자기기를 보여주는지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이는 뮐러의 디자인 작업물들이 바우하우스(1919-1930)에서부터 울름(1953-1968)으로, 울름에서 브라운(1950년대 중반)으로, 그리고 뮐러에서 라미로(1966년은 라미 2000, 1974년은 라미 CP1, 1984년은 라미 Unic)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라미 2000의 바디 곡선은 반죽기 뒷부분의 곡선에서 가져왔다. 이에 더해 펜과 반죽기는 비슷한 내부 비율을 가지고 있다. KM3의 몸체 비율은 라미 2000의 닙부터 철제 부위, 분할선부터 곡선이 반대로 휘기 시작하는 부위, 그리고 나머지 부위와 상응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람스의 좋은 제품의 10가지 원칙을 인용하자면 "제품의 아름다움은 제품이 매일 사용되면서 사람들과 그들의 웰빙에 영향을 주기에 제품의 유용함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중략) 어떠한 목적을 충족하고자 하는 제품은 도구와도 같다. 이들은 장식도 아니며 미술 작품 또한 아니다. 따라서 이들의 설계는 중립적이며 절제되여야만 한다." 곡선미와 내부 비율의 아름다움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KM3와 라미 2000에 걸쳐 일정하게 나타나는 뮐러의 디자인

뮐러가 브라운에서 라미로 가져온 또 다른 디자인 성향은 비슷한 면도기와 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철과 플라스틱의 비율이다. 이 비슷함은 굉장히 눈에 띄며 이에 함축된 사실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각각의 제품에 "비즈니스" 부분(면도날, 닙, 그리고 그립)은 철제이며 플라스틱 몸체는 내부 부품(전자부품과 파워 서플라이; 잉크 보관 공간과 충전 메커니즘)을 숨기고 있다. 람스의 좋은 디자인 원칙을 인용하자면, 이 설계 선택은 "제품의 유용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감소시킬만한 것들을 전부 배제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에만 집중한다.

SM31과 라미 2000의 스테인리스 철강과 플라스틱 비교. 제품 전체 크기 비율은 실제 비율과 불일치

라미 2000과 뉴욕 현대 미술관

내가 뉴욕 현대 미술관과 라미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의 부주의함을 의미할 것이다. 라미에 따르면 "라미 2000은 너무나 존경받는 작품이기 때문에 뉴욕 현대 미술관에 영구적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수많은 수상을 해왔다"[footnote] 현재는 보지 못했다는 목격자도 등장 중. 인벤토리에 기록이 없어 치워진 것으로 추정중[\footnote] 이 뉴욕 현대 미술관과의 연결은 라미 2000 전설의 일부분이 되었다. 뮐러의 작품 3개는 미술관이 보관 중이라고 나오나 이중 라미 2000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게대가 아예 온라인 수집 작품 목록 데이터베이스에도 라미 2000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세 개의 펜만이 미술관 아카이브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전시되어 있지 않다. 오로라 하스틸(이 중 유일한 만년필), 명성 높은 Bic 크리스탈 볼펜, 그리고 플래티넘 Z 볼펜과 샤프 세트다. 어쩌면 라미 2000에 대한 이야기가 부풀려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야기가 사실이길 바라지만, 제시할 수 있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라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글을 쓰는 현재(2012. 8) 미술관의 아카이브는 외부인이 접속할 수 없는 상태다.

라미 디자인에 대해 마치며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든 말든, 뮐러의 "좋은 디자인" 감각과 기업에 대한 만프레드 라미의 비전이 라미 2000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펜의 성공은 라미를 침체되어가는 어중간한 펜 기업에서 오늘까지 건재한 디자인 중심의 거대한 기업으로 변화시켰다. 오늘날 라미는 부품 97%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며 모든 펜들을 하이델베르크 캠퍼스에서 조립한다. 독일 3대 기업 (라미, 몽블랑, 그리고 펠리칸) 중 오직 라미만이 여전히 가문 소유이며 독일인 소유 기업이다. 지나가는 시간과 쌓여가는 이익이 라미와 뮐러의 협동 실험이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라미는 "다른 제품 디자이너와 디자인 스튜디오들에 영향을 미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두 독립된 창조 정신들과 같은 디자인 업종에서 일하는 직원들 간의 견해 교류"를 통해 이뤄지는 "회사의 새로운 디자인 성향을 위한 초기 기동력" 제공의 공적을 뮐러에게 돌린다. 이 헌신은 라미 제품 전반에 걸친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 FPN 유저 Kaweco가 언급했듯이 "만프레드 라미 박사님. 40년 동안 필기구의 세계에서 뛰어난 아이디어들을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미 디자인을 위한 만프레드 라미의 비전은 1966에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원글: http://www.fountainpennetwork.com/forum/topic/227631-lamy-2000-and-the-origins-of-lamy-design/#entry2431618

원글 CCL: This work is licens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ShareAlike 3.0 Unported License by Brandon Hollingshead, August 2012, for The Fountain Pen Network. This license extends to all text, images, and videos associated with this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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